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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단편 소설집] 아크라시아 단편집 - 숨겨진 이야기 ver. 0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에 주인공의 모든 서사가 써내려져 가는 것은 아니죠.


우리이면서, 우리가 아닌 모험가의 서사에서 이제는 간략하게 축소되어 트루아로 대체되어버린 모험가들의 프롤로그와 로스트아크의 세계 안과 바깥에서 이루어진 여러 이야기를 조악하지만 많은 애정을 담아 써내려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공식에 비해 다른 부분이 있고, 또 부실할지언정 로스트아크의 스토리를 사랑하는 여러분께 조그마한 선물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야기의 막을 올립니다..


(!주의! 이 글은 4월 27일 엘가시아 업데이트 이전에 쓰인 글입니다.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어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또한 모든 에피소드들은 모험의 서/숨겨진 이야기처럼 해금 전/해금 이후로 추가되는 이야기가 있는 형식입니다. 읽기에 불편하시더라도 에피소드 별 위 아래에 있는 해금 전/해금 이후까지 다 읽어주세요.)


(파일 갯수 제한으로 인해 해금 후는 글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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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에피소드 1. [사소한 구원]

에피소드 2. [오늘 날씨, 구름 조금]

에피소드 3. [충신의 하소연]

에피소드 4. [어린 어른]

에피소드 5. [스튜 한 그릇과 영웅이 되는 방법]

에피소드 6. [인터뷰 기록/식별번호: 040221]

에피소드 7. [편지를 실어 보내요]

에피소드 8. [대사부의 어떤 하루]

에피소드 9. [복사꽃 피던 날]

에피소드 10. [감사의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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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사소한 구원]



[해금 전]




그렇기에 평소 가지 않던 곳에 가면 심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사그라들까 하는 생각에 발길이 닿은 곳은 애니츠의 어느 이름 없는 꽃밭이었다.

언제 쓰러졌는지 모를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자, 시야 가득 꽃잎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가는 바람 한 점에도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

광기에 물들어 제 누이를 찌르곤 죽어가던 한 소녀.

두 눈 가득, 두려움을 안고 성벽 아래로 떨어지던 이름 모를 한 병사.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고 절규하던 한 케나인.

저런 시체가 되고 싶지 않다며 비명을 지르던 한 여인.

얼어가면서도 이젠 춥지 않아도 된다며 힘겹게 웃는 어린아이.

변질된 마력에 죽어가면서도 죗값을 치러야한다고, 미안하다고 눈물짓던 제나일의 자매.

우리의 선조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 리 없다고 비통해하던 한 우마르.

검은 비에 파묻혀 소리 없이 죽어간 한 데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자기 자매와 친구, 그리고 동료를 찌르곤 어디론가 사라진 한 니아 아가씨.

그 날 전까지만 해도 열매를 손에 쥐고 웃던, 차가운 절벽 아래로 던져진 어린 타이예르.

여왕 폐하를 외치며 용맹하게 돌격했을지언정,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한 기사.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꽃잎처럼 사그라들었다.

너무나도 빨리 져버린 이들 위에 서 있는 난.

영웅 중 하나라 연호 되며 추앙받는 나는.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은 산처럼 쌓여만 가는데, 하나같이 입 바깥으로 꺼내기엔 두려움만 앞섰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의문이 가라앉기만을 바라며 하염없이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뿐.

누군가가 나를 발견한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돌아본 등 뒤에 서 있는 낯익은 무도가.

전장 한가운데에서 호쾌한 기합 소리를 내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 그게. 그러게요.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그러나, 낯이 익었다고 하기엔 전장과 스쳐 지나가던 여행길 위 말고는 마주칠 일이 더 없었다.

만날 때마다 애니츠에 오면 자신의 가문에 찾아와달라고 사람 좋게 웃던 그녀와는 달리, 그는 같은 출신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이들과 특별한 교류를 보이진 않았다.

나도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많았을지언정 누군가에게 다가간 적이 없었으니, 그와는 얼굴만 익숙한 그런 관계였다.

그렇기에 전장도, 대도시의 술집이나 광장도 아닌 이 이름 모를 꽃밭에서 마주친 이 상황은 묘한 불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곳엔 무슨 일이지?"

그리고 그도 나와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듯, 약간 날카롭게 들리는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장소이길래.


"음... 그냥 발길 닿는대로 왔을 뿐이에요, 바람 좀 쐴 겸 해서."

한없이 사실에 가까운 대답이었지만, 자격지심에 가까운, 그런 의문들에 지쳐서 찾아왔다는 속내까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같은 전장에 서 있을지언정, 같은 선상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또다시 끈적한 자기혐오가 물 밑 아래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애써 미묘한 의심의 눈초리에 기분이 약간 상한 것을 무시하자, 그의 손에는 항상 악마들의 피로 물들어있던 건틀릿은 없고 여린 꽃 한 송이만 들려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꽃밭에 웬 꽃이죠?"

아.

그러는 그쪽은 왜 찾아왔는지 묻는 게 맞을 것 같은 상황에서 멋대로 튀어나온 질문은 예상치 못한 침묵을 끌어냈다.

"그, 그게... 일부러 시비 걸려던 건 아닌데..."

그는 침묵의 시간 동안 아주 약간, 당황했다가 시선을 돌리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이름조차 나눈 적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한 이 상황에서 복사꽃 흐드러지게 날리는 꽃밭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너머에 뭐가 있나 싶었지만 나풀거리는 분홍 꽃잎만이 그득 시야를 메우고 있었다.

어색하고 무안한 침묵 속에서 들려오지 않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슬슬 지겨워질 무렵,

"... 내 가족. 사형, 동문."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하는 그의 음성이 꽃잎들 사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헌화를 하려고."

그리고 그의 얼굴은 슬피 웃고 있었다.

다시금 바라본 저 너머에는 솜씨 없이 쌓아둔 야트막한 돌담 같은 무언가가 꽃잎들 사이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이 무덤임을 알아차린 순간. 확, 하고는 순식간에 얼굴 위로 붉은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 그랬군요... 미, 미안해요. 저는 그냥, 이름 없는 꽃밭인 줄로만 알고..."

그런 의미가 있는 장소인줄도 모르고,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입장에서 미묘한 의심의 눈초리에 기분 상한 나 자신이 더 한없이 모자라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 의심조차 의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발길 닿는 대로 찾아온 것이 이렇게 후회를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퀘어홀의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대체 어디로 달음박질쳐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자괴감과 함께 어우러져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머리속에 찬물을 들이 부은 것은,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었다.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저 여기까지 왔으니, 같이 그들에게 인사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네?"

순간 멍한 대답을 내놓았음에도 그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전... 그래, 오래전에 연가문에 속했던 시절. 동문 중에서 애니츠 바깥으로 나가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거든. 무술의 기본도 다 떼지 못한 어린 동생들조차."

저 너머를 바라보는 그는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그의 옛 시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천제일검을 겨룰 때면, 다음번에는 자신이 제일검이 될 거라느니 허풍을 떠는 이부터 해서 저 멀리 타지에서 찾아온 이들을 쫓아다니며 다른 곳의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듣다 수행을 빼먹는 이들도 있었지. 특히 어린 동생들이 그랬는데..."

아리고, 가슴이 미어지지만 더는 돌아오지 않기에 애틋한.

그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그러니, 누구보다도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이를 만난 네가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들도 참 기뻐할 거 같아서."

감히, 거절의 말을 입에 올리기는커녕 그런 생각조차 품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겨우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꽃잎들을 헤치며 나아간 꽃밭의 한 가운데에는 주변 다른 돌무더기보다 조금 더 높고 견고하게 쌓인, 비석 없는 무덤이 있었다.

그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미 오래되어 말라버린 꽃들 위로 손에 쥐고 있던 또 다른 꽃을 얹고는, 손을 맞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다.

나 또한 그가 한 것처럼 손을 맞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무언가 애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뒤숭숭한 마음으로는 겨우 눈꺼풀을 내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몇 초간을 그렇게 감았던 눈을 뜨자 그는 무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슴 한 켠을 어딘가 날카롭게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항상 자괴감이 들 때마다 드는 느낌이었다.

"뜬금없는 제안이었는데, 정말 고마워. 같이 와줘서."

그래서일까, 흐린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감사를 전하는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입 안 가득 의문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추모도, 기도도 아닌 무언가에 불과했는데도 괜찮냐고.

그렇게 우는 듯이 웃고만 있어도 되냐고.

정말 내 행동이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었냐고.

질문은 참 많은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 뿐.


"그들도 기뻐할 거야."

대답이 없는데도 뭐라 추궁하기는커녕, 그저 순수하게 호의를 건네는 그에게 미안했다.

아니, 이곳에서 만나서 자초지종을 알았을 때부터 그랬다.

그냥 이렇게 감사 인사만을 받고 가도 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문득, 그가 내게 했던 제안이 생각났다.


"아뇨, 이야기. 이야기를 해주기로 약속했잖아요."

그가 제안한 대로 이야기를 하러 왔으니, 다시금 사색에 잠기려는 그의 침묵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냥,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어린아이가 떼쓰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모두가, 좋아하면 좋겠는데..."

허공에 손을 휘저어 하프를 꺼내자, 돌아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무시하며 현을 튕기려는 찰나, 막연한 두려움이 그림자 뒤에서 튀어 올랐다.

옳은 행동인지, 이래도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닌지 모를, 알 수 없는 두려움.

나를 바라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차마 얼굴을 마주하고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무덤 앞에서 제대로 된 추모도 못 하는 모지리로 보일까?

아니면 눈치도, 철도 없이 고집만 피우는 어린아이로 보일까.

다른 사람 눈에 난 대체 어떻게 보일까.

하지만 현에 실을 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 내쉬자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동경심과 부러움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 그래.

나는 바드.

마음 가는 대로 세상을 떠돌며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아닌가.

어쩐지, 그냥. 이 순간만큼은 전장에서 영웅들을 고조시키는 세레나데 대신, 꽃잎처럼 스러지고 잊혀져간 이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라기보단,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에 잠든 이들도, 어딘가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들도.

막연하지만 그러기를 바랄 것만 같았다.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가는 바람 한 줌과 따스한 햇빛 한 조각과 흩어져가는 꽃 한 송이를 담아.

잊혀진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자작곡 하나.

복사꽃 사이로 흩어져가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는 말없이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어쩐지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서글퍼하는 어른 같기도 한 모습으로.

"... 이상하죠?"

그 모습에 그냥, 픽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니, 좋은 노래였어. 정말로."

그리고 정말 순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다시금 이유 모를 웃음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제나 여왕님을 뵈러 갔었을 때 내게 뭐라고 하셨더라.

대마법사 엔비스카의 영혼을 계승 받았으면서도 왜 하필 바드가 되고자 했는지, 그런 질문을 하셨었는데.

막상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못 했었지만, 이제서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기억났다고 말하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칠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해금 후]

... 이 세상에는 참 수많은 영웅이 있다.

수줍게 웃으며 비파로 고운 음색을 연주하는 한 아가씨부터,

낡은 술집에서 술 두 잔을 시키고 홀로 사색에 잠긴 해결사.

그에게 다가가 말없이 곁을 지키는 총잡이.

어린아이의 미소를 위해서라면 모자란 연기도 서슴지 않는 한 전사.

어린 데런들에게 희망과 헌신, 그리고 달콤한 케이크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데런 소녀.

꽃이 만발한 해변가에서 고향 생각이 난다고 수줍게 웃다가도 꼬마라고 놀리지 말아 달라며 토라지는 요즈족 꼬마아가씨.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 아래서 슬프게 웃는 무도가와,

나.

스러져간 이들과 별다를 바 없이 고뇌하고, 슬퍼하고, 안도하며 기뻐하는.

그렇기에 더욱 찬란히 빛나는 영웅.

그게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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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 [오늘 날씨, 구름 조금]


[해금 전]



한참 주인님이 혼나다가 힝힝 울면서 무서운 실린 눈나한테 종이뭉치를 잔뜩 받았다.

그걸로 종이비행기를 만드려는걸까? 고럼 엄청 재미있을텐데.

근데 성 바깥으로 나왔더니 주인님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종이비행기를 만드는 건 아니었나보다.

내가 쪼끔 더 실링도 잘 줍고 애교도 많이 부리면 주인님 기분이 좋아질까?


그러고보니 주인님이 멀리멀리 배를 타고 가야한다구 내일부턴 나보구 농...머였지? 하여튼 로핸만큼이나 이쁜 곳에 가서 기다리라구 했다.

주인님이랑 떨어지는건 무섭지만 다섯밤만 자고 오면 다시 만날 수 있다구 했구 거기가면 다른 칭구들도 많구 또 쿠키도 마니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저어번에 생일이라구 치킨이랑 케이크를 주셨었는데 그것보다 맛있겠지?

너무너무 궁금하구 그래서 용기내서 아브링 눈나한테 내일 가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그냥 웃기만 했다.. 눈나는 왜 웃기만 해도 무서운건지 모르겠다.


엄청 기대가 댄다!!

빨리 내일이 오면 좋겠다. 가서 칭구들이랑 잔뜩 놀아야지!!

그리구 다섯밤도 빨리 지나면 좋겠다.

실링 줍고.. 계속 뛰어다니는건 초큼 힘들 때도 있지만..

난 주인님이 세상에서 제일 조은 모코콩이니까!


[해금 후]

####년 @월  @@일 날씨  맑음

주인님 보고 시퍼요  농장 시러요 쿠키 시러오  비타냥 안머글래오  말 잘 들을게오  제인숙 악세 안주울게오  잘못햇서오..

(일기장이 눈물범벅이 되어서  더 읽어내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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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3. [충신의 하소연]


[해금 전]


군단장과 악마들에 의한 피해 수습으로 인한 수많은 업무와 로헨델에서 넘어온 보고서에 파묻혀 죽어가기 일보 직전이건만, 이런 중대한 사안이 미뤄지고 하물며 관심을 두는 이가 나, 미한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어찌나 처량한지.

그나마 폐하께서 관심을 두는 이라고는 아르테미스부터 지금까지 생사를 함께한 왕의 기사님뿐인 것 같던데...

애초에 정말 서로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원.


광장에서 곁에 계속 있어 주겠냐는 고백 아닌 고백을 폐하께서 기사님께 했었다는 헛소문인지 뭔지는 간간히 들려오는데,

아무리 서로 바쁜 상황이라고는 해도, 왕의 기사님은 저 멀리 로헨델에서 죽상이 된 얼굴로 찾아와서는 서류 더미만 던져두고 실태조사를 위해 타지로 나간 폐하를 기다리기는커녕 폐하에 대한 간단한 안부나 인사 하나 없이 도망치듯 항구로 빠져나간 데다가..

며칠 뒤에 돌아온 폐하는 엇갈린 것에 대해 아쉬워하시기는 하셨지만, 말하는 뉘앙스가 참..

얼굴을 못 본 것이 아쉬운지, 아니면 카단님의 소식을 묻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인지 참으로 애매모호한 반응이었기에 소문의 신빙성이 의심될 뿐만 아니라 내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두 분은 아실는지.

이 서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네리아의 술집에라도 가서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지만, 하셀링크의 귓가에 들어갔다가는 저번에 쓴 왕비 후보 목록에 자기네 어린 딸이 포함되었었다는 걸 알게 될 테고..

그랬다가는 내 목이 남아나질 않겠지.


에휴.


그저 술 한잔에 혼자 울음을 삼키다 보면, 또 성심성의껏 폐하를 보필하고, 수많은 전장에서 왕의 기사님을 보좌하다 보면은..

언젠가는 이런 고민도 했었지, 하며 웃을 날이 올까.

그런 것보다 내일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정리도 하고 저 멀리 페이튼으로 보고서도 보내줘야 하는데.. 로헨델에서 페이튼으로 먼저 갈 것이지 왜 여기로 와서는.. 

험난한 프로키온의 바다를 한참 지나갈 생각에 숨이 턱턱 막히지만, 충신중의 충신인 내가 안 가면 누가 가겠는가.


왜인지 모르게 더욱 술이 씁쓸한 밤이다.


[해금 후]

"예?  오늘 날씨가 어떻냐고요?  보시다시피 아주 험합니다.  아무래도 기사님께서 페이튼에 도착하고도 내내 이럴 것 같은데..."

(어디선가 고통에 찬 앓는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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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4. [어린 어른]


[해금 전]



"너희들 거기서 뭐 하고 있니?"

"언니!"

그러나 작은 화답에도 투정을 언제 부렸냐는 듯, 아이들의 얼굴 위로 저마다 화색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언니가 오랜만에 페이튼에 왔다길래 다같이 언니 기다리고 있었어. 진짜 오랜만이잖아..."

"정말? 언니 기다려준 거야?"

"응!"

그 누구보다 환히 웃으며 답하는 아이들.

페이튼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회의는 나에게도 적잖이 길게 느껴졌는데.

아이들에게는 더욱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었겠지.


밝게 웃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황급히 가방에 손을 넣어 뒤적여보았지만, 주머니도, 가방 속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좋아할 만한 것은커녕, 아베스타에게도 쥐여주기 좀 꺼려지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기분 나쁜 나팔이라던가, 촉감은 좋을지언정 어디서 구했는지 말하기가 꺼려지는 날개 가죽 같은 것 말이다.

"음..."

그래도 어찌저찌 아이들에게 건네주기엔 위험한 것들을 추려내고 나니, 고작해야 혈마석 주머니와 악취 나는 청어, 그리고 거친 호밀빵 한 덩이만 남아있었다.

아, 혈마석도 아이들에겐 위험하겠지.

주머니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고 나니 아이들에게 쥐여줄 만한 것은 직접 만든 호밀빵 한 덩이뿐이었다.


"저녁 먹었어?"

"아니!"

"이거라도 먹을래? 언니가 저 멀리서 사는 유목민들이 먹는 호밀빵을 만들어봤거든."

"진짜? 먹어볼래!"

"나도!"

텁텁한 호밀빵 한 덩이뿐인데, 내가 만들었다는 그 한마디가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조미료가 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리 웃으며 먹을 리가 없으니.

순록유라도 있었으면 아이들이 더 맛있게 먹었을 텐데.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요즘은 수도원에 안 가지?"

"응, 사제님들도 잘 안 보여."

"맞아, 페데리코 사제님도 바쁘신가 봐."

양 볼에 호밀빵을 욱여넣은 아이들은 그저 해맑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수도원에 안 가니까 좋다, 그치?"

"응, 언니도 이렇게 보고. 수도원 사제님들은 너무 무서워..."

"그래도 페데리코 사제님은 좋은데... 저번에 사탕도 주셨어!"

그러고는 자기네들끼리 소곤거리는 모습이 왜 붉은 열매를 쥐고 밝게 웃던 그 아이들과 겹쳐 보이는 걸까.

서둘러 떠나올 때 편지라도 하나 보내고 나올 것을.

비어있는 연통에 아쉬워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 못해, 시야를 어둡게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계속해서 종알거릴 뿐이었다.


"사탕... 맛있겠다. 엄청 달콤하고 딱딱한 구슬이라며?"

"엄청 맛있었어! 또 먹고 싶다.."

"그러고 보니까 비올레 오빠랑 여관 사람들은 케이크라는 걸 먹었대! 쫄깃쫄깃하고... 되게 신기한 맛이라던데?"

그리고 아이들의 종알거림은 그 한눈판 사이에 어딘가 위험한 방향으로 뛰쳐나가기 일보 직전을 앞두고 있었다.

"아냐! 아니, 먹지 마. 아직도 마고가 케이크를 만드나...?"

소금과 설탕대신 거미 진액을 부어넣고 초콜릿 대신 말라비틀어진 가지를 장식한 케이크라고 하기도 뭣한 괴식을 아이들이 먹었다가는...

어쩌면 타락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지도.

하지만 내가 과민반응을 한 것이 아이들에겐 오히려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언니, 왜? 우리도 케이크 먹어보고 싶어..."

"맞아! 비올레 오빠가 멍때릴 때마다 케이크가 맛있었다고 막 중얼거린단말야!"

"하, 비올레..."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반짝이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항구로 달려가 모코코 마을에 연락을 취해야겠지만, 바다 위 날씨가 좋지 않은 현 상황으로서는 아무리 빨라야 삼사일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난 내일 새벽같이 슈샤이어로 떠나야하고.


"먹고 싶어! 케이크!"

"케이크!"

"얘, 애들아. 언니가 다음에 꼭 가지고 올게."

"히잉.. 지금 먹고 싶어!"

갈 곳 잃은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아이들을 뜯어 말려보아도 아이들의 아우성을 더더욱 커질 뿐이었다.

"우리도 먹어보고 싶어... 언니 가면 언제 오는지도 모르구..."

"맞아! 왜 비올레 오빠만 준건데! 너무해!"

한 명은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하고, 또 다른 한 명은 입이 댓발 나와서 오리인지 모를 정도였다.

아, 이걸 어떻게 한담.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다면 아이들이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투정을 부리는구나, 하고 귀엽게 바라볼만한 광경이겠지만, 정작 이 상황 한가운데 있는 나는 죽을 맛이었다.

안된다고 호통을 치기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투정이 아니던가.


"언니가 진짜 바빠서 그래. 저 멀리서 급하게 오느라..."

"또 멀리 가면 언제 올건데! 치..."

"저번에도 열 밤 자면 온다더니... 한참 지나서야 왔잖아."

"애들아..."

하늘은 이제 붉어지다 못해 어둑어둑해져만 가는데, 아이들의 눈가는 서서히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왜 맨날 어른들은 우리한테 절제니, 뭐니 배우라고만 하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거 하면 왜 안 돼? 우리도 케이크 먹고 싶어! 우리도 놀고 싶구... 그렇단말야..."

"맞아.."

애꿎은 옷을 양손으로 구기며 훌쩍이는 아이들의 투정에는 다른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데런의 숙명이 빚어내는 슬픔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데런인 이상, 해줄 말은 잔혹한 답 하나뿐이었다.


"우린... 탐욕에 물들면..."

"괴물이 된다구.. 알아. 맨날 수도사님들이 무섭게 말했는걸."

힘겹게 토해낸 말이었건만, 아이들도 이미 여러 번 그 말에 상처를 입어왔는지 돌아온 것은 퉁명스러운 대답뿐이었다.

"..."

목 언저리가 턱하고 막힐 만큼.

"뭐야, 너네들 언제부터 거기있었냐?"

"굴딩?"

그리고 뒤통수를 둔탁하게 때리는 듯한 목소리.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굴딩이 너무나 반갑게 느껴졌다.


"네 녀석들, 수도원에 안 간다고 여기서 노닥거리기나 하고 있구만?"

"왜요! 아저씨도 밤마다 춤추러 지하로 간다면서."

"우리도 다 봤어요!"

"네?"

이건 대체 또 뭔소리람.

"굴딩, 춤이라뇨?"

"아, 뭐 그건 알 필요 없고. 케이크? 허, 너희가 안 먹어봐서 그래. 얼마나 맛이 끔찍한데."

"그럼 비올레 오빠는 왜 맛있었다고 한 건데요?"

"언니가 준 케이크, 우리도 먹고 싶어요!"

"이 자식들..."

귓가에 굴딩이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아니, 근데 지하에 뭐 춤을 추러 간다는 이야기는 또 뭐지?

아베스타의 새로운 훈련인가 싶으면서도 지금까지 돌아다닌 다른 대륙에서 그 누구도 춤을 추면서 훈련하는 곳은 본 적이 없었는데.

아, 욘이라면 좀 다르려나.. 아니면 파푸니카?

애초에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마을엔 하나둘씩 촛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빠르게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얘들아, 언니가 정말 나중에 케이크 들고 올게. 정말로."

"거짓말. 언제 올 건지도 말 안하구."

"또 열 밤 한참 지나서 올 거잖아!"

입술이 삐죽 나온 아이들은 케이크를 얻기 전까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악마화라도 해서 옆구리에 끼고 집에 던져넣어야 할까..

말도 안되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또 데런이라면 그 정도는 버티지 않을까 하는 또 다른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구만. 이런 거에 붙잡혀있었던 거냐?"

"네..."

"아저씨 너무해!"

"너무해!"

"뭐 임마?"

그러는 자기도 아이들에게 붙잡히긴 매한가지였으면서 아닌 척 한두 마디 툭툭 던지던 그도 아이들의 아저씨라는 말은 이겨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바로 손을 들어 올려 아이들의 정수리에 딱밤을 놓으려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굴딩! 그러지 마요!"

"익, 때린... 어?"

"응?"

하지만 모양새만 그리했을 뿐, 정수리로 향하던 그의 주먹은 아이들의 얼굴 앞에서 활짝 펼쳐졌다.


노랗고, 동글동글한 작은 구슬 두 개.

이미 까맣게 물든 하늘 저편에서 별을 따온 것 같았다.

"이건..."

"저기 뭐 모모코인가 모코코인가 걔네들한테서 구한 벌꿀 사탕이니까, 하나씩 먹어."

"와! 진짜요?"

"맛있겠다!"

손바닥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에도 작은 별들이 반짝이더니 굴딩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냉큼 자기네들 입속으로 하나씩 집어넣었다.

"달콤해... 맛있다!"

"히히, 고마워요!"

"그럼 이제 들어가!"

내가 이런저런 말을 해도 잔뜩 떼만 쓰던 아이들은 입에 작은 사탕을 넣었다고 굴딩이 호통을 치건 말건 그저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겨우 큰 고비를 넘겼으니, 그 자리에는 의문들만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언제 그런 걸 샀어요? 아니, 또 춤춘다는 건 뭔데요?"

"항구를 개방한 지가 언제인데. 괜히 베른까지 다른 놈들 도우러 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뭔 춤을 추는 건데요? 칼도르도 같이 춤춰요?"

"..."

"알려줘요! 저 그럼 궁금해서 슈샤이어도 못 가요."

"햇병아리... 그만 물으라고 했잖아!"

"아, 검은 매라고 칭호까지 받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렇게 부를 거예요?"

"내가 햇병아리라면 햇병아리야! 얘들한테 뭐 쓴소리도 못 해서 쩔쩔매는데 그럼 얘나 다름없지!"

"그래서 밤마다 춤추시는 거예요? 지금 추러 가는 거 맞죠?"

"그, 그만!"

어쩐지 굴딩이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웃기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벌써 여관이던 어디든 가서 자고 쉬어야 하는 시간이 훌쩍 지났건만 놀리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러면 어린애나 다름없는데.

아, 뭐 상관없겠지.

데런이건 뭐든 다들 살아가면서 이러지 않는가.


[해금 후]

"그 녀석... 있던 사탕을 다 뜯어갔어!"

"그래서 또 주문한 거예요? 하이비 꿀 모으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그리고 우리는 모모코가 아니라 모코코라구요! 나쁜 코코모!"

"코모모던 뭐던 내 이름은 굴딩이라고. 이 만큼 주문했으면 그만 이름 좀 외우지 그래."

"흥, 케이크도 이만큼 만들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하세요? 당신들 같은 코코모에겐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이만큼이나 만들려면.. 에휴."

"여기엔 케이크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꼬맹이들이 워낙 많아서."

"흠. 그래요, 그럼 빨리 만들어야죠!"

(항구의 부산스러운 소리는 점차 멀어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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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5. [스튜 한 그릇과 영웅이 되는 방법]


[해금 전]


고민만 깊어가던 어느 날, 마을 광장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머리카락 대신 나뭇잎이 달린데다가, 어쩐지 초점이 엇나가있는 맹한 눈동자를 가진 연두색 탈을 쓴 정체 모를 누군가.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수상해 보이는 그 사람은 레이든과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던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 한 가운데 무언가를 설치하기 시작했답니다.

마을을 터트리기 위한 폭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웅이 되고 싶었던 레이든은 가장 굵어 보이는 나뭇가지를 들고 기합을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연두색 손에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히고 말았죠.

"이이익... 이 괴물! 마을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레이든이 소리쳤지만, 연두색 괴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바닥에 나동그라진 나뭇가지를 레이든의 손에 쥐여주곤, 다시금 마을 한가운데에 무언가를 설치하려고 했죠.

그 모습에 어벙해진 레이든은 연두색 괴물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장작을 싹 긁어오는 것으로 모자라 너무나도 수상해 보이는 상자와 항아리를 쌓아두는 연두색 괴물.

레이든은 지금이라도 저 연두색 괴물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쳐야 하나 싶었지만, 회심의 일격이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힌 탓에 섣불리 나서지 못했죠.

그저 애꿎은 나뭇가지만 양손으로 꽉 쥘 뿐이었답니다.

한참을 그렇게 수상한 행동을 반복하던 연두색 괴물은 커다란 솥을 마지막으로 다 되었다는 듯이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뿌듯해했죠.

저 연두색 괴물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요? 설마, 마을 사람들 전부를 저 솥에 넣고 삶아버릴 생각은 아니겠죠?

레이든의 머릿속에 차오르는 불길한 생각들을 더 부채질하고 싶은 듯, 연두색 괴물은 커다란 솥 밑에 장작을 쌓아 올리곤 화르륵, 불을 붙였답니다.

그러고는 수상하기 짝이 없던 상자와 항아리 안에 있던 무언가를 커다란 솥 안으로 재빠르게 집어넣기 시작했어요.

그 손놀림이 어찌나 재빠르던지, 레이든은 그게 뭔지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가득 담긴 솥 안에서 피어오르는 향긋한 냄새는 맡을 수 있었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그런, 따뜻하고 아주 맛있는 냄새가 마을 광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어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레이든만큼은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죠.

사람들을 맛있는 냄새로 유혹하고선 영혼을 갈취한다던가, 혹은 냄새만 좋은 독을 넣은 악마의 음식일지도 모르니까요.

사람들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솥단지만을 쳐다볼지언정, 레이든은 다시금 나뭇가지를 쥐고선 연두색 괴물 앞에 섰죠.

레이든은 영웅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다시금 기합을 내지르며 연두색 괴물에게 달려들었지만, 레이든은 사실 자신이 없었어요.

아까도 너무 쉽게 가로막힌 공격인데다가 애초에 레이든은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레이든의 일격은 정확히 연두색 괴물의 옆구리에 들어갔어요.


그러나 거기까지. 연두색 괴물은 옆구리를 맞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솥에서 가득 끓어오르던 스튜 한 그릇을 레이든에게 먼저 건네주었답니다.

당황한 레이든은 건네받은 스튜를 던지려고 했지만 그렇기엔 냄새도 겉모습도 너무나도 맛있어 보이는 스튜였어요.

물론, 맛도 훌륭했죠.

허겁지겁 한 그릇을 해치운 레이든은 쭈뼛거리며 연두색 괴물에게 다가갔어요.

"저... 죄송해요. 악마가 부리는 수작인 줄 알고..."

레이든은 정말 큰 용기를 내어 사과했지만, 이번에도 연두색 괴물은 아무런 말이 없었어요.

그저 그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일 뿐이었답니다.


그날 밤, 레이든은 잠이 오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투기장으로 떠났던 밤에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외로운 밤에도 잠이 잘 오지 않던 그였지만 오늘은 그 이유가 달랐어요.

낮에 있던 일이 계속해서 레이든의 머릿속에 맴돌았죠.

물론, 엄청 맛있었던 스튜도요.

광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솥단지 안에 뭔가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니. 그냥 낮에 있던 일이 생각난 레이든은 어두운 밤중에 낡은 담요를 둘러쓰고 광장으로 나왔어요.

레이든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또 있었던 걸까요?

솥단지 주변에는 연두색 괴물과 어른들 몇 명이 서있었답니다.

주변 수풀 더미에 몸을 숨긴 레이든은 어른들이 남은 스튜를 먹는지 지켜보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스튜를 먹기는커녕, 마을 사람들과 여명단이 연두색 괴물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기 시작했죠.

"...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침공으로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찾아와주시다니..."

"그러게요, 페이튼에서 넘어온 보고서만으로도 바쁘셨을 텐데..."

"그러면 내일 바로 아르데타인으로 떠나십니까? 허리는..."

침공? 보고서?

아무리 생각해도 연두색 괴물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말하는 어른들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요.

더 가까이 듣기 위해 살금살금 몸을 놀리던 레이든은 그만, 얇은 나뭇가지를 부러트리고 말았어요.

"거기, 누구냐!"

깜짝 놀란 레이든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여명단 어른들께 잡히고 말았답니다.


"그,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해서요...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여명단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배급품을 나누어줄지언정, 화가 나면 엄청 무서운 사람들이었어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레이든은 어떤 호통이 떨어질지 몰라,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답니다.

"그만, 얘가 놀랐잖나."

하지만 레이든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호통도, 거친 욕설도 아닌 자신을 두둔하는 아주 낮은 음성이었어요.

그리고 그 음성은 다름 아닌 연두색 괴물에게서 나왔죠.

"어, 어? 말할 줄... 아셨네요?"

"그래, 말할 줄 알지.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 남은 음식은 내일 여명단원들이 나눠줄 테니."

어딘가 익숙한,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연두색 괴물은 화가 잔뜩 난 여명단 어른들을 막아서고선 레이든을 서둘러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어요.

"저, 저 녀석 분명 도둑질이나 하려고 나왔을 텐데..!"

"이런 차림을 하고 찾아왔으니 창문으로 발견하고 나왔을 수도 있지 않나. 자네들도 처음 봤을 때 안 놀란 것처럼 굴지 말게."

"으윽... 알겠습니다."

여명단원에게 집으로 질질 끌려가려던 레이든은 그제야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났어요.


슈샤이어를 노예상과 악마들로부터 해방시킨 전설의 영웅이 새벽종을 울리며 자유를 외치던 날.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았다는 걸 기억해낸 레이든은 여명단원의 팔을 뿌리치고 연두색 괴물, 아니. 빙결의 전사님께 달려갔어요.

"저, 저... 빙결의 전사님 맞으시죠...?"

하지만 달려갔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죠.

낮에 전사님의 허리를 후려친 것을 사과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전사님처럼 멋진 영웅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어야 할지를 몰랐어요.

애초에 어째서 저런 이상한 모습을 하고 찾아왔는지 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저 레이든은 우물쭈물하며 뒤쫓아오는 여명단원에게 혼날 마음의 준비를 했답니다.


하지만 전설의 전사님은 뭔가를 알고 있었던걸까요?

"꽤나 좋은 자세더구나. 그리고 아주 멋진 마음가짐이었어."

라고, 말하며 레이든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답니다.

그리고 탈에 가려져 있었지만 분명, 그에게 웃어주는 것 같아보였죠.


그 말을 끝으로 여명단원에게 꼼짝없이 잡혀 집에 돌아가게 된 레이든은 침대에 누워 많은 생각들을 했어요.

맛있었던 스튜와 이상한 옷을 입고서 나타난 빙결의 전사님.

그리고 전사님이 레이든에게 해준 칭찬까지, 전부를요.

한참을 생각하던 레이든은 까무룩, 잠이 들었지만 어쩐지 사제님들이 그에게 해주었던 알쏭달쏭한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죠.

분명, 영웅에 가까워 질 방법을 조금 엿보았으니까요.


[해금 후]

... 린드리, 잘 지내?

로웬에서 빨래하는 건 어때? 많이 힘들진 않아?

네가 칼트헤이츠에서 많은 친구들을 해방시켰다고 들었어.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조금 웃었는데..

지금은 그걸 사과하고 싶고, 또 네가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나는 요즘 리겐스 마을에서 여명단원분들을 돕고 있어.

일은 많이 힘들지만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힘이 나.

(레이든의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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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6. [인터뷰 기록/식별번호: 040221]


[해금 전]


슈테른에서야 매일같이 노이호이테와 아우겐슈테른이 공화당이던, 뭐던 가십거리를 풀어내곤 하지만... 허, 인터뷰 중에 신문사에 대한 악평은 금지되어있다고? 어이가 없구먼 그래.


뭐 하여튼... 여기는, 글쎄.

솔직히 말해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다 거기서 거기거든. 모래폭풍이 거세졌다든가, 기계로 대체한 부위에 문제가 생겼다던가 하는 그런 사소한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야 다 비슷하긴 하지. 바텐더의 삶이라는 게 그렇지 않겠어? 항상 자극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면 기자가 되었을 테지만..


아, 기자에 대한 험담 또한 금지라고? 저게 어딜 봐서 험담으로 보이나? 거참 속 좁은 형씨로군.

뭐, 그래. 기자를 욕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정정하지. 그저 난 그런 것보다도 노을 져가는 주점에서 술 한 잔만으로도 누군가를 위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 더 값지다고 말하려던 것이었네.

적어도 나는 그렇지만... 나 같은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 모든 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으니.

아,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어버렸군.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날도 여느날과 같은 날이었지. 모래폭풍은 거세고, 저 멀리서 악마들이 발견되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그런 날.

주정뱅이들에게 값싼 맥주를 몇 잔씩 건네주고, 성과금을 받았다며 동네방네 자랑하는 용병들이 큰맘 먹고 와인을 주문하는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네.


뭐? 노이호이테 구독은 안 했냐고? 갑자기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보나? 

그거에 대답해줄 의무는 없으니, 인터뷰나 계속 하자고.


하여튼, 그렇게 매일같이 찾아오는 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다 가고 나니 생각보다 꽤 이른 시각이더군. 간단한 빗자루질도 끝마쳤겠다, 잔들을 싹 다 꺼내 깨끗이 닦으려던 와중 누군가 가게를 찾아왔다네.

앞서 말한 대로 청소는 끝마쳤지만... 어쩌겠는가. 마감 시간은 남아있었고 가게 불도 끄지 않았으니 그대로 손님맞이를 해야지, 안 그러나?

어서 오라는 인사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던 그는 그냥 가게를 한번 슥 둘러보더니 다른 테이블도 아닌, 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네.

뭐, 그때부터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때 당시 내 머릿속엔 어서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 들어차 있었거든.


아니, 바텐더도 사람이야! 나도 쉴 때는 쉬어야지. 그러는 자네는 휴일도 다 반납하고 회사에서 사나?

에휴, 말을 말아야지. 내가 무료 광고를 해준다는 말에 속아서는.


하여튼, 그래.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그는 술을 주문했지. 용병 나부랭이들이나 마실 싸구려 위스키 한 잔과 우리 가게에도 몇 없는 모래바람 위스키 한 잔을. 그것도, 동시에 말이야.

솔직히 나는 그때 그자가 미친 건지, 아니면 할 일 없이 술 품평이나 하러 다니는 한량인지 알 수가 없었다네. 자네도 주점을 한 번이라도 가봤다면 알지 않나? 그런 명품주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술은 한 잔씩만,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을.

바텐더인 이상, 그런 주문은 용납할 수 없었지... 만, 뭐 어쩌겠는가. 실링도 아닌 골드를 선불로 지급했으니 원.

아니나 다를까, 잔에 이슬이 맺히고 그 귀한 술이 얼음에 희석되어가는 동안 그자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냥 잔들을 바라볼 뿐이었네.


또 뭐 다른 건 없었냐고?

흐음.. 그래. 이쯤에서 자네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총. 딱 봐도 고장 난 총을 테이블에 올려놓았길래 난 그가 정말 미친 자인가 싶었다네.

아무리 이 토트리치가 험한 구석이 있다곤 하지만 강도에 휘말리는 것은 질색이거든.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 그 총이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챘거든.

그리고 술 두 잔을 동시에 시킨 괴짜가 누구인지도.


아주 오랜만에 본다고, 네 활약상은 여기 토트리치까지 간간히 전해지고 있다고... 반갑게 인사라도 건넬까 싶었는데,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일부러 이렇게 조용히 찾아온 걸 보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뭐? 더 자극적인, 그런 내용 없냐고?

음... 그 이후로 누가 찾아오긴 했지. 백발의 멋진 여성이었는데...


감사관의 숨겨진 애인이냐고? 그러니까 노이호이테가 욕을 먹지.

그냥 동료로 보였다네. 나도 그녀가 몇 번 해결사로 일하는 것을 본 적 있으니.


아무튼! 남은 이야기는 더 없다네. 같은 동료로 보이는 여성이 들어왔고, 술 한 잔 시키곤 몇분정도 앉아있다가 뭐... 파푸니카로 가야 한다고 했던가? 그런 말을 남기곤 떠난 게 전부니까.

무슨 표정을 그렇게 짓나? 갑자기 가게 쉬는 날에 찾아와서는 인터뷰하고싶다느니 어쩐다느니 날 붙잡은 건 자네잖나.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잘 듣고 기사를 쓰는 게 자네 역할이 아닌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가게의 명물이나 좀 듣고 가게.


(그 이후로 30여 분간 황금 연료 주점을 자랑하는 주인장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해금 후]

"으, 특종을 건지나 했더니 그 점장한테 엄청 시달리다가 왔다구요."

"그래도 뭐,감사관이 다른 여성과 만나고 있다는 것 정도면 충분하지."

"점장 말로는 고작 몇분이었다는데요?"

"만난 건 사실이잖나. 자고로 기사란 10%의 진실과 90% 허구만 있어도 쓰이는게 기사라고."

"그렇... 습니까?"

[####년 @월 @일에 발간된 일일신문은 재무관님과 감사관님의 요청에 의하여 전간 회수조치를 시행하였습니다. 해당 기사는 저희 노이호이테호의 정치적 색채나 어떠한 성향을 대표하지 않으며 문제가 되는 기사를 수정 및 삭제 후 재배포할 예정입니다. 저희 노이호이테는 언제나 공정하고 투명한 기사를 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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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7. [편지를 실어 보내요]


[해금 전]



물론, 다른 분들이 불친절하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애니츠에서 왔다던 언니는 인사도 잘 받아주시고, 저 멀리 로헨델에서 왔다던 음유시인인 언니는...

착하신 것... 같아요! 착하실 거예요!


사실... 다른 사람들하고 자주? 종종? 얼굴을 보는데 친하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대부분 마주치는 전장에서는 더욱 말할 필요도 없고...

축제 광장에서 어쩌다 마주쳐도 자경단분들과 불법 입국자분들을 찾아낸다거나 아니면 족장님의 업무 때문에 다들 너무 바쁘거든요.

또 어제부터 아르데타인에서 넘어온 서류 때문에 잔뜩 일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세상이 조금 더 평화로웠다면 언니들이랑 별모래 해변도 걸어보고, 온천도 같이 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오빠들에게 서핑도 배울 수 있었을까요?


아직도 니아마을은 라일라이 축제의 여운이 남아있어요.

온 세상에 카오스게이트가 열리고 이곳, 파푸니카까지 광기군단장이 침범했었지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저 멀리서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요.


우리도, 다른 영웅 언니 오빠들도 다 함께 저기서 웃고 있으면 좋을텐데.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악마들을 쓰러트릴지 의논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고, 쉬는 날에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묻는 사소한 대화를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안 되겠죠?


영웅이란 칭호도 좋지만 가끔은... 림레이크에서의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 그립기도 해요.

먹물로 호랑이라기보단 고양이에 가까운 신수님을 소환했다고 기뻐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 물론 지금의 생활이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니예요!

당연히 악마들 사이에서 군단장 토벌을 하러 갔을 때보단 훨씬 나아요.

바쁘긴 해도.. 고향이 생각나는 꽃들도 볼 수 있고, 저 멀리서 사람들이 웃는 소리들도 들려오는걸요.


물론, 내일모레면 저 멀리 애니츠로 배 타고 가야 하지만 말이에요.

애니츠의 언니가 서류도 전달해주고, 시간이 된다면 회의도 참여하고 자기네 가문에서 쉬었다 가래요.

가는 길은 좀 멀긴 하겠지만...


말은 이렇게 저렇게 했어도 세상으로 나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제 힘이 누군가의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장로님.

아, 에스더 샨디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파푸니카에도 찾아오세요! 제가 담근 꽃술도 맛있게 익었거든요.

그럼 이만 편지 줄일게요. 건강하셔야 해요!


[해금 후]

"에잉, 쯔쯔쯔... 이게 무슨 편지냐! 일기장이나 다름 없구만..."

"뭐야, 영감? 말은 그렇게 하면서 편지는 왜 또 챙긴대?"

"내가 뭘 하는지 훔쳐볼 시간이 있거든, 빨리 가서 수련이나 하거라!"

"에잇, 진짜.. 망할 영감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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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8. [대사부의 어떤 하루]


[해금 전]



"그러게 누가 대문 앞에서 수상하게 얼쩡거리랬냐고! 붓도 들고 있겠다, 딱 봐도 벽에 낙서하러 온 꼬맹이로 보이지!"

저 꽥꽥거리는 목소리도 난간 위에서 바라보니 꽤 볼만한 광경이었다.

"내가 찾아올 손님이 요즈족이라고 한 건 귓등으로 들었나 봐?"

그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는 꼴도.

"이, 이익..."

대사부 시험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몇 시간을 더 꽥꽥거리다 수장님에게 걸리곤 한참 설교를 듣는 것이 주된 레파토리였는데.

제 행동이 부끄러운 짓인 걸 깨닫기라도 한 것인지, 아님 제 분에 못이겼는지는 몰라도 호동은 잔뜩 식식거리다 부리나케 도망을 쳐버리고 말았다.


"재미없네."

난간에 팔을 기대어 턱을 괴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수장님께서는 별로 좋아하시진 않을텐데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

전장에서의 기합 소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목소리였다.

"너도 재미없고."

"하하..."

하긴, 이렇게 어색한 웃음 따위를 짓는데 어떻게 전장에서의 그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할까.


"굳이 예의 차리지 말라고 했잖아. 어차피 이번 회의 때 연가문의 제자가 아니라 동료이자 한 명의 영웅으로 온 것 아니었어?"

"그렇습니다."

힐끔, 바라본 옆에는 차분하던 목소리와 달리 입술을 잘게 깨무는 모습을 한 그가 있었다.

그 모습에 안타까움과 동정이 옅게 피어났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넌 아직도 네가 연가문에 속해있다고 생각해?"

"이미 제명되었대도 할 말은 없습니다."

뜬금포로 튀어나온, 어떻게 보면 예의에 한참 어긋난 질문에도 너무나 착실한 대답.

그 대답에 말문이 살짝 막혀올 뻔했다.


"아니, 내 말은. 너를 제명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 스스로가 연가문에 속하고 싶어 하는지 묻는 말이었어. 애초에 우리가 그런 일로 제명할 속 좁은 가문도 아닌걸."

그래, 어떻게 제명하겠는가.

다른 일도 아니고, 우리 가문의 사제, 사매들이 요괴의 손에 무참히 죽어간 비극인데.

홀로 살아남아, 홀로 복수를 한 그에게 어떻게 무책임한 선을 그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저는..."

그의 얼굴 위로 옅은 고민이 흘러가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네 선택을 존중해. 아버님도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아?"

하지만 처음 부터 빠른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당시 손 내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지금이라도 그를 존중하고 싶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버님께서도 그러셨고.


"가주님께선 제가... 연가문의 속가제자라 말씀해주시더군요."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 아버님께서도 네 위상을 깎아내리려고 그 칭호를 쓰신 건 아니랬어."

난간 저 아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이기도 하면서, 무언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아 보였다.

고민인지, 망설임인지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무슨 의도인지는 압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 선택을 존중하기 위함이겠지요."

"음... 솔직히 말해서 네가 떠난다는 선택을 한대도 우리가 할 말은 없어. 그 일이 있었을 때, 그리고 다시금 요괴들이 나타났을 때 행동한 것은 너였지, 우리가 아니니까."

다시금 바람이 분다.

나무와 담벼락을 타고 소용돌이치며 다 져가는 꽃들의 잔향을 담아 코끝에 속삭인다.

"제가 떠나길 바랍니까?"

그의 고민이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다고.


"응?"

"저는 연가문의 일원이고 싶습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뭐라 딴지를 걸 수 없을 만큼.


"그래, 넌 우리 가문 사람이잖아. 그리고 내 동료고."

애초에 딴지를 걸 만한 구석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죠."

"그리고 이 위험에 빠진 아크라시아를 구할 세기의 영웅 중 하나지."

그렇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명쾌한 대답을 내놓는 그에게 못다 한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예?"

"또 뭐가 있을까. 홀로 수련한 결과가 가문에 내로라하는 수제자들보다 월등한 수재? 누구보다 앞장서 혼돈의 권좌로 오른 용사?"

"..."

그러나 가득 당혹한 채 어찌해야 할지 모를 반응이 되돌아오는 것 또한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어쩌겠는가, 말을 돌려야지.


"알겠어, 그만할게. 그러고 보니, 며칠 전이 그 기일이었지? 미리 말했으면 좀 도와줬을 텐데."

안 그래도 아버님께서 사당에 이미 그들의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 제단을 정성스레 꾸미고 향을 올리며 그들의 넋을 위로해 줘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그냥 넘겨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도 함께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게 대사부로서 가진 책임감인지, 아니면 연가문의 일원이라서 드는 마음인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마 그 혼자서 무덤가에 찾아갔겠거니 했는데.


"괜찮습니다. 같이 찾아가 준 이도 있었고."

그의 대답은 또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갔다.


"같이? 누가?"

다른 이에게 그런 일을 쉽사리 꺼낼 사람이 아닌데, 대체 누가 그와 함께 무덤가에 찾아간 걸까.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슬슬 그 요즈족 아가씨를 찾으러 가야겠군요. 아마 시장 어귀에서 뭐라도 사 먹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가볍게 난간에서 뛰어내린 그는 다시금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내가 놀린 것을 복수라도 했다는 듯이.


"잠깐! 말 돌리지 말고! 누구인지 말은 해줘야지!"

그를 뒤쫓아 나도 난간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그가 나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현을 뜯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뭐?"

갑자기 뭔 소리인가 싶어 난간에 발을 올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에게 되묻자 그는 더더욱 천진한 소년 같은 얼굴로 화답하기 시작했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멋있더군요."

그리고는 저 멀리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 뒤로 의문들이 길게 늘어져 갔다. 


"대체 뭔 소리야..."

어차피 금방 그 꼬맹이를 데리고 돌아올 것이 분명하지만.

왜일까, 굳이 지금 당장 그를 불러다 대체 뭔 소리인지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 대신 그날 이전의 그를 아주 살짝 엿본 느낌이어서 그럴까.


"뭐, 비파 좀 가르쳐주다 보면 알게 되겠지."

아니면 그냥 이런 평화로운 하루를 만끽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바람이 귓가에 나부낀다.


[해금 후]

"뭐야, 내가 가르쳐줄 필요가 없는데?"

"어깨 너머로 본 것이 전부입니다만.."

"아냐, 진짜 잘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깜짝 놀랄걸?"

"..."

"그래서, 누구야? 설마, 나한테 배울만한게 없다고 말 안해줄 건 아니지?"

"그건.."

(두 사람의 말소리는 점차 멀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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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9. [복사꽃 피던 날]


[해금 전]


"제대로 임하는 게 아니라 꾀만 잔뜩 부리니까 그렇지."


"아 몰라! 또 이렇게 잡혀들어가면 항아리 500개는 닦으라고 할 거 아냐... 호동 형은 그거 보고 또 놀릴테구."


"사형."


"그렇게 꼭 꼬투리를 잡아야 해? 연가문도 아니라 심지어 적가문이잖아."


"말했잖아. 기본이 되지 않으면 무술을 무술이라 칭할 수 없다는 거. 그리고 같은 대사부를 모시고 있으니 사제관계가 맞지."


"힝... 그래도 속상하단 말야. 맨날 나는 잡심부름만 하고, 호동 형아는 연가문도 아니면서 볼 때마다 자기는 미래의 대사부가 될 텐데 너는 잡일꾼이 되고 말 거라고 놀리기나 하고."


"잡심부름이 아니라 수련의 일부인걸."


"하물며 아가씨도 1 대1로 다 큰 성인들과 수련하는데.. 난 뭐야..."


"아가씨는 연 가문의 후계자시잖아. 그리고 실력도 출중하시고."


"하지만... 그래도 형은 안 억울해? 아가씨나 호동 형, 아니 호동 사형이랑 나이도 비슷하면서 형은 나 잡으러 오는 이런 잡심부름이나 하고... 다른 건 몰라도 발차기 하나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하잖아!"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그냥, 형도 스승님한테 잡일 말고 좀 더 가르쳐달라고 하면 그 두 사람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냐?"


"글쎄, 그렇게 조급해할 일일까? 어차피 안 가르쳐주실 것도 아니고."


"아냐, 형! 몰라... 정말 이러다 잡일이나 하는 일꾼이 되면 어떡해? 난 항아리만 닦으면서 살긴 싫단 말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가자. 시간 나면 일도 좀 도와줄게."


"난 빨리 강해지고 싶단말야..."


"조급해하면 될 일도 안 돼. 차근차근 해야지."


"하지만... 난 빨리 강해져서,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걸.."


"왜 나가고 싶은데? 명성을 떨치려고?"


"아니! 내가 뭐 호동 사형 같은 줄 아나... 그냥,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지키고 도와주고 싶어서..."


"흐음..."


"웃지 말구!"


"안 웃어. 기특해서 그렇지."


"진짜? 비웃는 거 아니지? 그치?"


"그래. 못 믿겠어?"


"조금 비웃은 거 같은데.."


"안 웃었어. 자, 이제 가자. 가는 길에 고기만두 하나 사줄게."


"사탕도 하나 사주면 안 돼?"


"사탕?"


"응! 아까 보니까 사탕도 팔더라고... 복숭아 사탕."


"그냥 달기만 하지 않아?"


"그게 맛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형도 먹어봤구나?"


"사형."


"너무해 진짜..."


[해금 후]

오늘도 복사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납니다.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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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0.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실리안 서버에서 1590 바드를 키우고 있는 S0ir0n이라고 합니다.


조금 점잖은 말로 인사를 드리려니 약간 부끄럽네요. 워낙 눈동자가 3시 9시로 가있는 그림으로 많이들 만나뵈어서...


먼저 여기까지 길다면 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글에 숨겨 놓은 요소라던가 나름의 해석같은 수많은 TMI를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미 긴 글을 읽으셨을테니, 이 글을 써내려 가기까지 영향을 준 수많은 요소들에 대해서 만 말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지난 겨울에 있던 로아온 윈터에서의 기억의 오르골 소개였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컨텐츠라니, 전에 하던 게임에서도 쉽게 스토리에 과몰입하던 저로써는 기대할 수 밖에 없는 컨텐츠였죠. 실제로도 기억의 구슬 5번을 하면서 펑펑 울었습니다...ㅎㅎ


그런데 기다리면서 곰씹다보니 '아, 우리도 잊혀진 이야기가 있지 않나? 트루아로 개편되면서 엄청 약소화된..'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맨 처음 로아를 시작했을때 거의 두시간은 매달려 아브렐인가 뭔가하는 염소뿔 악마로부터 실린들의 세상을 지켜냈는데 전직도 하지 않고 진행하는 튜토리얼이라고 해서 정말 깜짝 놀랐었거든요.


그래도 그 충격도 잠시, 얼마 하지도 않고 그 유명한 영광의 벽도 가지 못한 채 접었다가 하던 게임을 더는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물리게 되어(여러분이 예상하시는 그 게임은 아닙니다.) 다시금 로아로 찾아오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오래오래 플레이 했던 개별 프롤로그는 트루아라는 지역으로 통합이 된다는 소식을 들었죠.


트루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트루아가 나오게 되면서 프롤로그가 없던 젠더락 클래스들에게도 서사가 생기게 되었고, 직업별 스킬을 조금이나마 활용해볼 수 있는 것으로 모자라 엘가시아와 그 이후까지 이어질 떡밥을 보기 좋게 배열해두었으니까요. 


하지만 두 번이나 했던 마법사 프롤로그도 그렇고, 동영상으로만 접했지만 매력이 넘치던 다른 프롤로그를 직접 할 기회가 영영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이 서툴지만 이렇게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네요.


뭐.. 또 그 외에 손을 꼽자면 커뮤니티에 간간히 올라오던 로스트아크 내의 세계관에서 직접 써 내려간 듯한 수많은 글과 만화들이 있겠네요.


사실은 정말 실력만 된다면 이번에 글이 아니라 직접 그림을 그려서 만화로 참가하고 싶었는데..


음... 제 그림 실력을 제가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글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법을 배운 적은 없어도 타자는 칠 줄 아니까요.


여러분께 제가 그림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애니츠의 꽃밭과 페이튼의 어린 아이들, 추운 리겐스 마을의 밤이 전달되었을까요?


이제는 짧은 영상으로 대체된 프롤로그를 직접 겪어온 모험가들이라면 이런 일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써 내려간 글인만큼, 조금이라도 여러분들께 와 닿았기를 바랍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공모전이 늦게 개최되어 엘가시아의 이야기는커녕, 기억의 오르골 열화판이라 느껴지는 글이지만요.


엘가시아 스토리도 정말 인상적이었어서 가능하다면 엘가시아를 배경으로 한 글도 넣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요.


뭐.. 뿌쓩빠쓩 환영의 문으로 정원지기 머리 위로 올라가볼게요 하는 도화가랑 그걸 뜯어말리는 데모닉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건슬이라던가.. 아니면 모두가 대광장에 모인 이야기 같은걸요.


나중에 꼭 기회가 되면 모험가뿐만 아니라 기억의 오르골처럼 있을법한 NPC들의 이야기도 써 내려보고 싶습니다. 두개 정도 있기는 한데..!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 써 내려간 글이 두서없이 길어졌네요. 


다시 한번 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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