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아크

상단 메뉴

UCC게시판

실리안 ver.1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비가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타앙. 타당. 타다다당.

빗줄기는 검날을 때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질 때는 투명했지만 땅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엔 색이 물들어 있었다.

"실..실리안..."

페이튼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에 거세게 쏟아지는 비가 더해지니 사방이 흐릿했다. 비가 어찌나 거세게 쏟아지는지, 땅에 부딪힌 빗방울들이 뿌연 안개를 만들어낼 정도였다.

"어째..서..."

실리안은 제 눈높이보다 조금 내려간 사내를 보았다.

패자의 검에 꿰뚫려 생명력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하니, 실리안은 미소가 느릿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네가 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게..."

스으윽.

실리안은 패자의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천천히.

그의 몸에 박아넣었던 검신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척추뼈, 내장, 근육, 혈관 그 모든 것에 부딫히고 긁히는데서 나오는 미세한 반응을 빼놓지 않고 느끼겠다는 듯 천천히 당겼다.

"크악!"

사내가 괴로움에 비명을 내지르지만, 실리안은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네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게 나를 초라하게 했거든."

실리안이 검을 모두 뽑았을 때, 회색빛 머리칼의 사내를 실리안 쪽으로 고꾸라졌다.

"그..그게 무슨... 자네는... 에..에스더가.. 아닌가."

'에스더'라는 단어에 실리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이내 모든 감정이 빠져나간 듯한 무표정이 되었다.

실리안은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제 생명력을 붙잡듯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는 사내의 회색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에스더.

실리안은 대답 대신 조용히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제 손에 들린 패자의 검을 흘끗 보았다.

패자의 검.

왕의 자격이 있는 자가 가지면 빛을 낸다는 루테란의 선조 루테란의 검.

말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초라한 현실 뿐이라는 걸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려주는 존재.


자신은 루테란의 후예이지 루테란이 아니다.

루테란의 역대 왕들이 그러했듯 패자의 검과 함께 왕위를 이어받은 왕가의 자식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에스더들은 어떠한가.

바훈트루와 웨이를 제외한 모두가 에스더 본인들이며, 바훈트루와 웨이는 에스더에게 선택받은 유일한 에스더의 후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에스더들을 모아 규합한 에스더 루테란으로부터 500년이나 지난 후에 태어난 그의 후손일 뿐이다. 이마저도 왕실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패자의 검이 자신의 손에서 빛을 내고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이것은 루테란의 왕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둠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 자신이 왕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에스더가 된 거였다.


실리안은 회색 머리칼을 쥔 손이 점점 묵직해져 가는 걸 느꼈다. 자신의 옷깃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도 점점 힘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페데리코.. 자네와 내가 다를 게 뭔가."


친우인 아만은 신의 힘이 담긴 존재였다.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나의 기사는? 그런 아만조차도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자신은 뭔가.


그저 루테란의 왕일 뿐이다.

루테란의 첫 왕인 에스더 루테란에게서 선조에게로, 그리고 그 다음 선조에게로, 그것은 긴 시간 동안 반복되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까지 닿았고, 지금은 자신에게 닿았다. 이 다음은 내 자식에게 이어질 것이고, 이것은 과거에 그랬듯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왕관과 함께 이 '패자의 검'이 말이다.

이 말은... 패자의 검이 없다면, 자신은 페데리코 사제처럼 평범한 인간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루테란의 왕, 에스더 무기인 패자의 검을 제외하면 말이야."


투두두둑.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실리안과 페데리코를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 검붉은 색이 뒤섞여 땅에 고인 빗물이 땅의 파인 곳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실리안은 철퍽거리는 땅에 진득하게 흘러나와 고이는 페데리코의 피를 보며 그의 머리칼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털썩.

페데리코의 몸이 그대로 엎어진다.

페데리코의 피와 빗물이 뒤섞여 고인 웅덩이에 처박힌 그의 뒤통수를 보며 실리안은 읊조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묻는 것처럼.


"보통의 사제들보다 좀 더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 악마들이 움직일 때 신성력으로 도움을 준 자네와 악마들이 움직이고 운명의 별이 나타난 시기에 왕이 되고 에스더가 되어 도움을 준 내가 다를 바가 뭔가."

실리안은 그의 뒷통수에 발을 올렸다. 검은색 구두가 느릿하게 회색빛 머리칼을 짓이겼다. 그리고 페이튼 어딘가에 있을 왕의 기사를 떠올리며 먼 곳을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와 나는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나와 비슷한데 왜 나의 기사는 그대에게 더 많이 웃어주고, 더 많은 시간을 쏟는지.

도대체 자네와 내가 다른 게 뭔가....


실리안은 제 기사가 페데리코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그리고 그런 제 감정을 깨달을 때마다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다.

패자의 검을 빛낼 수 있도록 도와준 제 기사가 자신을 봐주지 않는데, 자신이 에스더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내가 에스더로서 있을 수 있는 건 그대가 있기 때문인데..."

그때 저 멀리서 은은한 금색빛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뒤이어 작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의 기사."

어쩌면...

실리안이 메마른 눈으로 제 발 아래 깔려있는 페데리코의 뒤통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죽으면, 날 괴롭게 하는 건 없을지도 모르겠어.

자네와 내가 비슷한 존재라면, 비슷한 존재는 한 명이면 충분할 터.

실리안은 저 멀리서 제 이름과 페데리코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페데리코의 뒷통수를 밟고 있던 발을 내렸다. 의식을 잃은 페데리코의 손이 움찔하며 아직 살아있다는 미세한 신호를 보낸다. 그걸 빤히 보았고, 또 알면서도.

실리안은 패자의 검을 들어올려 페데리코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았다.

패자의 검이 이번엔 페데리코의 목을 꿰뚫었다.

실리안이 패자의 검을 뽑았을 때, 부러진 검끝 때문에 깔끔하게 끊어지지 않은 근육 몇 가닥이 페데리코의 머리와 몸을 연결하고 있었다.

타악.

실리안이 구두코로 페데리코의 머리통을 쳐, 가냘프게 연결되어 있던 것 마저 끊어버린다.

"잘가게."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였던 것은 그대로 굴러서 거센 빗줄기와 함께 페이튼의 저 깊은 벼랑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곤 몸만 남은 시신을 실리안은 쓰윽 훑어보고는 느릿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걷어서 자신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실리안! 쫄딱 젖었잖아. 어서 막사로 가서 옷을 말리자. 아참. 페데리코 못 봤어? 이 근처로 수색을 갔다고 들었거든."

제게 우산을 씌워주며 페데리코를 찾는 자신의 기사를 내려다보며 실리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페데리코가 비를 잘 피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아니 근데 실리안.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왜 걸어온 거야. 뛰어야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재잘대는 제 기사에게서 우산을 빼 잡으며 실리안은 미소지었다.

"비를 쫄딱 맞아 놓고 뭐가 좋다고 웃는 거야! 여기서 실리안이 감기 걸리면 미한한테 얼마나 잔소리 들을 지... 으으 생각만 해도 두렵다."

실리안은 자신의 기사에게 괜찮을 거라 다독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거세게 쏟아지며 순식간에 세상을 적신 비가 흐릿해졌을 때 즈음.

찰박. 찰박.

사제복을 입은 목 없는 시신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런. 루테란의 후예가 반복되는 선택의 시간을 심연으로 끊어내고자 한 모양이야. 후후. 이것 참 흥미롭군. 그렇지 않아?"

긴 그림자 옆으로 그림자가 하나 더 생겨난다.

".....실리안."

"이 사제의 시신에 남아있는 신성력은 엄청나군.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보랏빛 피부의 손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른다. 그러자 허공이 벌어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눈을 뜨고, 머리 없는 페데리코의 시신을 꿀꺽 삼킨다.

"카마인. 어쩔 셈이지...."

"글쎄. 아직은 고민 중이라 해두지. 후후후."

카마인이 흡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올려 웃으며, 게이트를 연다.

"슬슬 나와의 계약을 생각해 보라고."

긴 그림자의 주인인 카마인은 기다림 없이 게이트로 들어갔고, 다른 그림자의 주인은 실리안과 왕의 기사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더니 이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실린 떠내려가유 목록보기

댓글 0

댓글 쓰기
글쓰기 맨위로